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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2006

북미대륙 농장경영 첫 한인 박수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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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람들/ 북미대륙 농장경영 첫 한인 박수영 씨


미국에 이주해온 한인 1세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하던 직종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장사하거나 직장생활들을 하고 있다. 언어소통 장애로 자신이 해오던 직업을 살리면서 살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보면 한국에서 전공한 분야의 특성을 살려 미국에 와서도 계속 이어가는 한인들도 적지 않다.


분야는 여러 직종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요즈음과 같은 최첨단 시대와는 동떨어진 농업분야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농업은 한국에서 조차 젊은이들이 농사짓기를 거부하고 상당수가 도심으로 빠져나가는 업종이다. 그런 영향으로 이제는 농촌의 농부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계 제일의 문명국인 미국에 와서도 농사를 천직으로 오로지 외길인생을 걷고 있는 한인이 있다.


박수영(71)씨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농대에서 공부한 실력을 살려 지금까지 40년간 농업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68년 처음 캐나다로 이주해와서부터 16년간 무, 배추를 재배했으며, 90년도부터는 질 좋은 무, 배추를 만들기 위해 종자개발 연구에 착수,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하늘과 땅을 벗 삼아 농업에 투신하고 있다.


박씨는 북미대륙에서 외국에 이민 나온 한인으로 농장을 경영한 첫 한인이다. 한국에서 서울농대 화훼과를 58년에 졸업한 후 당시 농업 진흥청 산하 우장춘 박사연구소에서 주로 꽃에 관해 관심을 갖고 일을 했다. 그랬던 박씨가 꽃에서 종목을 채소로 바꾼 것은 이민 왔을 당시 북미대륙에 꽃 경기가 좋지 않은데다 채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이민 올 때 직장 동료가 김치 만들어 먹으라고 준 배추종자를 심어서 품종을 거둔 것이 농업에 뛰어들기 시작한 첫 출발이다.


당시는 캐나다 한인 2,000명이 양배추로 김치를 담궈 먹을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박씨가 처음 배추를 농장에서 재배하니 한인들이 사다 먹기 시작, 뉴욕과 LA, 시카고, 워싱턴 한인사회의 80~90%가 박씨네 배추로 뒤덮이다 시피 했다는 것이다. 1970~80년까지 그의 배추는 캐나다와 뉴욕에서 '최고의 배추'라며 날개 돋친듯 판매되었다. 덕분에 무, 배추를 따라 한 곳에 있지 않고 옮겨 다녔다. 그때마다 쉬고 잠을 자는 곳이 그의 집이었다. 아내가 있는 뉴욕의 집에서도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야말로 무, 배추와 함께 한 인생이다.그러나 어카운팅을 하면서 판매나 경영을 뒷바라지해주던 부인 박정희(65)씨가 병이 나 농장을 더 이상 할 수 없자 할 수 없이 한국의 배추육종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인 전문가를 초빙, 캘리포니아에서 종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3 년쯤 하다 거리가 너무 멀어 겨울동안 따뜻한 플로리다, 여름에는 캐나다로 이동, 식물이 좋아하는 기후를 따라 다녔다. 마치 갓난아이 데리고 다니듯 오로지 흙과 공기, 햇볕을 벗 삼아 세상물정 다 뒤로 한 채 무, 배추와 더불어 살았다. 그 바람에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흙과 더불어 사는 날이 더 많았다. 이렇게 살다 보니 자신은 좋은데 "늘 떨어져 뒷바라지하며 지내는 아내가 혼자 고생도 많이 하고 살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 이제는 다 자라 성인이 된 외아들 현식과 유미, 아미 두 딸과도 자주 자리를 같이 못해 그 점이 늘 아쉽다고 한다.


이런 어려움도 마다하고 미국의 동, 서부를 오가며 새로운 품종개발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박수영씨. 그의 꿈은 언제나 꼭 질 좋은 무와 배추를 만들어 그의 농부생활의 마지막 열매를 보람있게 거두겠다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박씨는 지난 16년 동안 중간 중간 나오는 새로운 씨의 연구결과를 테스트해보기 위해 플로리다, 캘리포니아, 업스테이트 뉴욕, 캐나다를 일년에 몇 차례 오가며 무, 배추를 재배했다. 그리고 상품가치가 있을 경우 마켓에 내놓고 곳곳으로부터의 반응을 수집한다.


이번 무가 너무 길다 싶으면 다음해 연구할 때 다시 짧게 만들고, 뿌리가 너무 많으면 없애기를 연구하고, 맛이 없다 싶으면 맛을 다시 내기 위해 바꾼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연구해서 자꾸 종자를 좋게 만들어 시중에서 원하는 좋은 품종의 재료를 확보하는 것이 그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다.


그동안 그에게는 어려움도 많았다. 캐나다에서 지역이 춥다 보니 무, 배추에 웬만한 것은 꽃이 피어 상품가치가 잘 안 돼 이를 바로 잡기 위해 꽃도 늦게 피고, 맛도 좋고, 모양도 좋으며, 추위나 더위, 병에도 강하게 하기위해 품종개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행운이 따라 이북에서 나온 특수 종자(한국에서 해방 이후 그걸 만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노력하고 애썼다고 함)를 손에 넣게 됐다. 그 유전인자는 세포질 유전을 하는 '웅성불임(male sterility)이었다. 그걸 계속 10여 년동안 유지, 개발해 완성단계에 들어가 무 잡종을 만들었다. 그것이 '래디쉬 하이브리드(radish hybrid)'인데 이걸 무 본산지인 한국의 큰 시장에 팔기 위해 한국의 옛 동료들을 통해 관련회사에 연결, 재료 및 종자 만든 것을 다 건넸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관련품종에 관한 특허가 나온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까지도 다 나와 이제는 그가 아무리 무 잡종을 만들어도 한국에는 판매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경위를 곳곳에 알아봤으나 한국의 특허법이 신청 6개월 이내에 이의 신청을 안하면 그것을 견제할 길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씨는 그때 캐나다에 있어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재료를 가지고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그는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시중에서 원하는 좋은 품종을 내기 위한 씨를 만들어 내기 위해 지금도 계속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배추 경우도 꼭 같은 유전인자를 가진 인자를 3년 전 발견했다. 이를 기해 꽃이 늦게 피고, 병에 강하고, 여러 가지 좋은 특성을 지닌 배추를 만들어내기 위해 MS(male sterility)개발에 마지막 열의를 쏟고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 중국, 일본 등 어느 나라에도 아직 만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꼭 100%가 돼야만 실용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MS를 꼭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기존의 회사들이 아무리 잘 만들어도 불화합을 이용해서 거기에는 원종이 섞여 나오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MS를 이용하면 원종을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남들이 그 잡종 종자들을 복사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기존의 회사들이 다 원종이 섞여 나오는 품종을 복사해서 품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배추의 경우, 현실은 아무도 100% MS를 이용해 실용화한 연구가가 없다고 한다. 그런 MS를 만들기 위해 박씨는 오늘도, 내일도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배추에 온 정열을 쏟고 있다. 박씨에 의하면 그 결과가 올 7, 8월이면 거의 확실시 될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의 꿈이 이루어질 것인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료원 : 뉴욕aT센터 / KoreaTimes(뉴욕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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