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세계 최대의 농업국가다. 넓은 땅과 비옥한 토양, 천혜의 기후 조건이 그 바탕이다. 하지만 오늘의 미국농업이 이 자연조건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치열한 세계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생산관리를 뛰어넘어 유통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수확 후 품질관리나 마케팅 전략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 농산물 유통, 그 현장을 들여다 본다.
수확이 한창인 미국 캘리포니아 살리나스 밸리의 한 양상추 농장. 자로 잰 듯 일렬로 늘어선 양상추 사이로 십수명의 멕시칸들이 낯선 기계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며 수확 작업을 서두르고 있었다. 두사람이 짝을 맞춘 작업은 한사람이 수확과 다듬기를 하고 다른 한사람은 선별과 포장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었고,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기계는 그 자리에서 규격 상자에 포장을 끝내도록 설비돼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수확된 양상추가 예냉에 이르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최대 두시간이다. 수확-선별-포장-예냉을 최단시간에 끝냄으로써 양상추의 품질과 신선도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품질 유지를 위한 노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예냉된 채소들은 저온저장고에 입고된 뒤 최종 소비지에 도착할 때까지 100% 저온물류를 통해 이동된다. 운송 트럭들은 상품을 싣기 전 트럭 내 온도를 1℃까지 낮춰 채소의 온도 손실을 방지하고 소비지의 도매시장은 판매장 자체가 저온저장고 역할을 하도록 돼 있어 시장에 입고된 농산물은 모두 저온저장된다. 소비의 최종 단계인 소매점에서도 채소류는 모두 냉장쇼케이스에 진열·판매되고 있다.
눈에 띄는 점은 밭에서 수확과 동시에 포장된 상품은 마지막 소매단계 직전까지 모든 유통과정에서 처음의 포장상태 그대로 유통된다는 것이다. 수확시 철저한 선별과 포장뿐 아니라 포장의 규격화, 유통 전 과정의 물류 기계화 등이 전제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규모화 덕분이다. 개별 영농법인의 경작면적이 수천㏊를 넘는 규모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이 같은 효율적인 수확 후 관리·유통관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노력들은 미국의 판매환경을 고려할 때 필연적인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미 서부에서 동부까지 걸리는 시간은 차로 5일. 예냉이나 저온물류 없이는 살리나스 밸리에서 생산한 어떤 잎채소류도 뉴욕같은 동부 도시에서 소비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값싼 노동력과 토지 임대료 등 낮은 생산비를 무기로 미국시장을 노리는 인근 국가들로부터 자국시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살리나스 밸리는 수확 후 관리와 저온물류를 통해 이 걸림돌을 제거했고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미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채소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실제로 캐나다에서는 채소를 사기 위해 왕복 10일이 넘는 먼길을 달려 살리나스까지 찾아오고 있고 일본에 브로콜리, 한국에 양상추 등 이미 세계 곳곳에 캘리포니아산 채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천혜의 자연조건에 안주하지 않고 규모화·기계화·품질관리로 무장하고 세계시장을 넘보는 미국 농업은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인 동시에 배움의 대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