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뉴스에서 본 한국 농업
조회1079외국 뉴스에서 본 한국농업
그 한국 농부는 두개로 나뉘어 있는 오이를 집어 잘라진 부분의 촉촉한 부분을 보여주었다. “두개를 다시 붙이고 일분만 기다리면 두개는 다시 하나로 붙을 거다” 양윤석씨는 말했다. 그는 쉽게 두개로 잘린 오이를 하나로 붙였다. 그는 붙여진 오이를 마술처럼 흔들었고 오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마술이 아니에요” “이건 유기농이에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 작은 농장에 있는 모든 것은 유기농이다. 조금은 마술처럼 그리고 미래의 한국 농업이 될 가능성이 많은 유기농 농장이다. 이 농장은 거대하지 않다. 겨우 4,000평 혹은 3에이커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이 3에이커에서 양씨는 30가지 종류의 유기농 야채를 기른다. 그리고 그는 60킬로미터 떨어진 한국의 수도인 서울에 이 야채들을 공급한다. 그는 또한 길을 마주하고 있는 상점과 인터넷의 e-farm시스템을 통해 유통시킨다. 수천명의 방문객들이 양씨의 성공과 마케팅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방문하고 있다.
스마일농장은 한국의 이상적인 장소인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서울의 북쪽의 한강 강변에 위치해 있다. 한강이 서울의 식수를 공급하기 때문에 스마일 농장 주변의 농장들은 환경과 강을 보호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지역은 한국 유기농 농장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우리가 양윤석씨의 그린하우스를 따라 견학을 하고 있을 때 그는 그의 거대한 참깨 잎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고 당밀과 알카리성 물을 혼합한 살충재를 뿌리는 것을 보여주였다. 그리고 나는 맛있게 달콤한 방울토마토를 샘플로 가져왔다. 이런 것을 보면서 한국 농업이 급박한 위기에 있다는 것을 알기는 힘들다.
방송에서는 피폐해진 북한 농업에 대해 보도 했고 이것은 전체인구의 10%정도가 아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참사에 한국 농업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고 한국의 농업위기는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다.
한국농업의 위기
2년전 잠깐 동안 한국의 농부들이 갑자기 미디어 스포트 라이트에 비춰진 때가 있었다. 2003년 9월 10일, 농부이자 도의원을 역임한 이경해씨가 칸쿤의 WTO 협상현장에서 300명의 한국 농업대표자와 노조 앞에 섰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역시 회담장의 펜스를 넘어 미팅을 방해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도 그는 나이프를 꺼내 자신의 심장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그가 죽기 하루 전에 그가 보낸 성명서에 그는 “다국적기업들과 몇안되는 거대한 WTO멤버들이 비인간적이고 환경을 파괴하고 농부를 파괴시키고 비민주적인 국제화를 이끌고 있다” 라고 썼다.
이경해씨의 자살은 한국의 충격을 던졌을 뿐 아니라 한국 농업은 성공적이라고 믿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결국 식량은 충분하고 상대적으로 값이 싸다. 한국의 농촌지역은 녹색의 부유한 곳으로 보인다. 한국은 두 세대동안 사하라 사막 남쪽 나라들의 일인당 국민소득에도 못 미치는 1960년대 농업국가에서 세계적인 공업국가로 탈바꿈했다. 좀더 나은 임금을 찾아 도시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 농민들은 1970-1980년대에 걸쳐 생산량을 늘려왔다.
하지만 낮은 식량가격, 농촌의 인구감소, 생산량 증대를 위한 공업적 접근등이 한국 농업의 위기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한국 식단의 중심을 형성하는 쌀과 배추를 생산하는 생산자들 조차 어려운 현실이다. 쌀 생산 농민들은 정부의 쌀 소비증가를 위한 쌀 피자나 쌀 아이스크림 같은 혁신에도 불구하고 쌀 소비비율 하락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국인들은 한국 기업들이 낮은 인건비와 낮은 가격의 배추를 위해 중국에서 생산한 수입 배추의 소비를 늘리고 있다.
“한국이 성공적이라구요?” 한국농촌사회연구소의 권영전씨는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이주했습니다. 생산량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식량자급률은 낮아지고 있습니다. 50개의 다국적 음식 프레차이즈 중 40여개는 한국에 진출했습니다.”
권씨는 식량자급률의 감소를 다양한 높은 생산력을 지닌 씨앗의 개발, 비료와 살충재 사용량의 증가, 농수로 사용량의 증가 등으로 대표되는 기술적 변화인 녹색혁명의 탓으로 돌린다. 이러한 변화는 효과적으로 농촌을 산업화시켰고 씨앗을 개발하는 기업(씨앗을 자신들이 보관하기 보다는)과 비료 공급업체(석유 부산물) 농수 제공 장비에 의존적 이 되도록 만들었다. 북한 또한 녹색혁명스타일의 농업으로 변했다. 북한과 남한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드는 화학비료 사용 국가이다. 두 나라는 비료 사용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를 만회하기 위해 화학살충제에 심각하게 의존하고 있다. 두 나라의 농업은 거의 수입되는 많은 양의 에너지의 투입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녹색혁명은 한국 농업의 생존능력을 파괴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이경해와 같은 사람들이 그토록 반대했던 미국이 1980년대 만들었던 두가지 결정에 기인한다. 상호적으로, 미국은 1980년대 말 국내 경제 보호를 위해 무역 장벽을 유지했던 국가들에 대하여 악명 높은 301조 무역조항에 의해 무역제재를 하겠다고 위협하게 된다. 워싱턴행정부는 한국정부에 미국산 담배, 와인, 쌀, 그리고 쇠고기에 대한 개방압력을 강화했다. 오늘날 미개방상태로 남아있는 부문은 쌀 시장 뿐이다.(2004년 말 한국은 외국산 쌀의 수입비율을 두배로 늘리는 조건하에 10년간의 관세화 유예화에 성공한다.) 칠레와 중국과의 상호적인 자유무역협정 또한 한국 농업에 큰 피해를 끼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국은 1980년대 중반 농업부문 또한 상호적인 차원에서 무역협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이후 미국은 자신의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농업부문에 대한 무역장벽을 유지했고 식량의 남는 부분을 냉전시기 동맹국들과의 동맹관계를 강화시키기 위해 사용한 바 있다. 1980년대 무역과 재정적자, 냉전을 위한 동맹국들에 대한 보조필요성의 약화는 미국의 입장을 바꾸는 요인이 된다. 결국 세계무역기구가 생겨나 강력한 농업 생산자들은 세계시장에서 농업이 약한국가들의 경쟁력없는 농업부문을 개방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게 된다. 관세장벽이 무너짐에 따라 한국은 타이산 쌀, 미국산 밀,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산 콩을 수입하게 되었고 한국 농민들은 더 큰 빚더미에 쌓이게 되었다. 이경해씨는 저렴한 호주산 쇠고기가 한국시장에 다량 수입됨에 따라 그 자신의 농장을 잃었다.
“1990년대 우르과이 라운드시기동안 한국 정부는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권영군씨는 말한다. “하지만 공업부문이 훨씬 강력했기 때문에 보호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2000년 벌어진 “마늘전쟁”만큼 한국의 공업부문과 농업부문의 힘의 차이를 통렬하게 보여준 예는 없다. 값싼 수입 농산물에 대한 농민들의 불평에 대해 한국 정부는 중국산 마늘에 대해 314%의 관세를 매겼다. 중국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에 대한 수입 규제를 선언하자 한국은 이 관세를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마늘은 아시아 음식에 다양하게 들어가는 품목일지 모르지만 세계시장에서는 한국산 휴대폰을 사용하고 휴대폰은 상당한 무역수지흑자를 가져다 준다.
친환경 해결책?
한국의 친환경 부분은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계속성장하고 있다. 친환경 농장의 수는 1999년부터 2002년 사이 두배가 되었고 토지규모와 생산량은 세배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행해지는 대부분의 그린농업은 유기농이라기 보다는 대부분 “환경친화적인 농업”에 속한다.(환경친화적인 농업2.5% 대비 유기농 0.02% Landry Consulting 자료) “환경친화적인 농업” 카테고리에서는 농민들이 여전히 화학비료와 살충제를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상당히 적은 양이기는 하다.
한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유기농 농업에 있어서 선두주자이다. 하지만 한국 유기농 농업협회의 나기수씨에 따르면 한국 유기농농업은 소비자와 연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들은 한국 정부의 지원을 매우 조금 얻고 있다. 높은 가격의 농업상품들은 높은 소비자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거나 할인된 가격에 판매되는 40%가량의 상품의 비용을 커버하는데 충분치 못하다.
여전히, 한국 농부들은 이윤을 얻는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 “서구에서는 소비자들이 부유해짐에 따라 식품안전에 대해 생각할 만큼의 경제 수준이 된다” 나씨는 설명한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농부들에게 찾아가 유기농 상품을 생산하라고 부탁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만약 이러한 유기농 제품을 경작해 주면, 모든 생산물을 사겠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완전히 반대이다. 농부들은 살충제와 화학비료 때문에 피해를 받는다. 농부들은 만일 그들이 많은 돈을 번다고 해도 이러한 방식의 농업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따라 농부들은 화학적인 도움없이 농업을 하려고 한다”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 국가로 만들었던 기적은 국민들과 시골을 해롭게 하고 있다. 2005년 지속가능한 환경 인덱스에 따르면 한국은 146개국 중 122번째로 환경이 나쁜 공업국가이다. 대기와 물은 악명높게 오염되었다. 환경운동은 지난 10년간 강력하게 성장했고 화학적인 도움없이 만들어진 음식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켰다.
유기농부문에서도 한국 농부들은 중국 채소와 같은 경쟁에 직면하고 있다.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권영군씨는 중국의 경쟁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중국산 유기농제품은 한국산보다 질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한국 농부들이 유기농업을 할때는 이것은 종교와 같아 높은 품질의 상품을 생산한다”
한국 정부는 유기농 움직임에 대해 투자와 영향력을 미쳐왔다. 비록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부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지만 한국정부는 1998년 지속가능한 농업 진흥책을 통하여 환경친화적인 농업을 수행하는 농민들에게 직접지불제를 시행하고 있다. WTO규정에 따르면 이러한 친환경농업 친화 정책은 사용될 수 있다. 환경적인 보호와 지속가능성을 촉진하는 정부의 이러한 보조는 현재의 농업협상에서 “그린 박스”로 규정되어 보호받을 수 있다.
유럽은 그들의 보조 구조를 그린농업쪽으로 바꾸고 있다. 한국 또한 유럽의 예를 따라 농업을 이익이 나는 구조로 만들 수 있다.
다음 정거장 : 홍콩
이경해씨는 2003년 자살하기 이전까지 몇 년간 한국 유기농 협회와 일했다. 비록 한국유기농협회의 나기수씨는 한국 유기농농업이 크게 발전했다고 믿지만 -“5년전과 비교해서 그 차이는 천당과 지옥과 같다”- 그는 전체적인 상황은 아직까지 황량하다 라고 인정한다. “이경해씨가 칸쿤 WTO 미팅에서 자살한 것은 한국의 농민 들이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이다” 하고 나씨는 이야기 한다. “한국에서는 농업에 기반한 정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농민은 늙었고 많은 농민들이 70살 이상이다. 이경해씨는 세계가 한국의 농업상황을 알게했다. 한국 정부와 다른 나라의 정부들은 이경해씨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한국 농업정책에는 큰변화가 없다. 이것이 슬픈일이다.”
1970년대 전태일이라는 비슷한 활동가가 노동자 시위도중 분신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22살의 젊은이는 분신했다. 전태일은 한국의 노동 착취의 말할수 없는 어려움에 대한 항거로 자살을 기도한 것이다. 한국의 노동 운동이 민주 정부 하에서 노동환경을 변화 시키기 까지 전태일씨의 분신으로부터 12년 이상이 걸렸다.
한국 농부들은 이경해씨의 희생을 되새기며 변화를 위한 긴 작업을 하고 있다. 2005년 겨울 WTO 각료회의가 홍콩에서 열릴때 한국 또한 그곳에 참석할 것이다. “농민운동은 그를 기억하고 기념할 것이다”라고 권영권씨는 말한다. “우리는 이번 겨울 홍콩가서 이경해씨가 찾았던 정의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
* 출처 : By John Feffer, AlterNet , 2005년 8월 29일
번역 : 서권재(aT광주전남지사 수출유통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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